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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法思想史)

信念의徐 2022. 2. 7. 04:26

 

.제1절 바이마르 공화국

1.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2. 법사상의 형질변경

3. 법철학적 쟁점

4. 정리

 

제2절 국가사회주의

1. 히틀러의 등장

2. 추방법률가와 계관법률가

3. 국가사회주의 법사상

4. 법률실증주의와 나치 법학

 

1.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독일 통일을 완성하고 학립된 제2제국(1871~1918)은 융커 출신의 제국수상 비스마르크(Bismarck)의 영도하에 진보적인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의 성장을 제압하고, 산업혁명의 추진력을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제2제국은 그야말로 군국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고, 나아가 봉건적인 국가였다. 당연히 독일제국헌법(일명 비스마르크 헌법: 1871년)에는 근대 헌법의 핵심요청으로서 국민의 기본권 목록은 전혀 존재할 수 없었고, 의회라는 것도 보잘것없는 장식품에 머물렀다. 그 체제는 초기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을 현실화한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사이비 입헌주의' 또는 '사이비 입헌주의적 반(半)절대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노회한 보수정치인 비스마르크는 전(前)산업적 권력 엘리트, 부르주아 산업세력, 군대를 결합하여 제4게급의 도전을 물리치고 일정한 사회계량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현상유지에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그러나 빌헬름 2세가 친정체제로 돌아설 즈음 유럽의 열강과 적대적인 관계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후발 자본주의국가가 독일은 선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 프랑스와 식민지 곳곳에서 대립하였고, 난국을 돌파하고자 제1차 세계대전(1914)을 도발하였다. 하지만 독일에게는 참담한 폐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종전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큰 사건을 야기하였다. 하나는 러시아에서 볼세비키의 주도로 소비에트 혁명(1917)이 성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제국 대신에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폐배로 독일의 빌헬름 2세는 국내외적으로 퇴임 압력에 시달렸다. 1918년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Kiel)에서 수병과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다른 도시에서도 노병평의회(勞兵評議會)가 권력을 장악했으며, 뭔헨에서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제국의 권력은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에바트(F. Ebert)와 사이테만(P. Scheidemann)에게 이양되고, 독일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확국이 선포되었다. 이와는 달리 베를린 노병 소비에트는 전국 소비에트총회(Raterkongre B)소집을 요구하였고, 여기에서 소비에트 국가가 수립될 것을 기대하였지만, 전국 소비에트 총회는 오히려 의회제 공화국에 참여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베를린에서 급진적인 스파르타쿠스단(Spartacus)이 봉기하였고, 뭔헨에서도 노병평의회가 소비에트 국가 수립을 요구하며 폭등을 일으켰다(1919)

 

이러한 봉기(峰起)들은 루터(Hans Luther)가 오로지 복종의 교리만을 전파한 독일 땅에서 16세기 농민전쟁 이래 초유의 사건이었다. 의회제 공화국 세력은 자유군단(Freikorps: 융커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은 퇴역군인으로 구성된 극우무력단체)의 도움하에 좌익의 봉기를 진압하고,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 의회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공화국 최초의 선거에서 다수파 사회민주당(MSPD)은 제1당은 되었으나 과반수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중앙당,민주당과 연정(聯政)을 구성해야만 했다. 급진적인 독립사민당(USPD), 공산주의자, 극우정당인 독일민족주의국민당(DNVP)은 연정에서 제외되었으며, 이러한 연정 구성방식은 공화국 막바지까지 대체적으로 계속되었다.

 

공화국의 첫 국민회의는 괴테(Goethe)와 실러(schiller)의 정신적 고향인 묵향 가득한 도시 바이마르(Weimar)에서 전 세계를 향하여 개최되었다. 가장 인문주의적인 독일인의 광체 속에서 독일 민족의 호전성을 완화시키고자 했던 이들의 소망은 나중에 히틀러(Adolf Hitler) 제국에 의하여 여지 없이 퇴짜를 맞게 되었지만, 이 공화국의 헌법(1919)만큼은 자본주의체제에서 탄생한 가장 진보적인 것이 되었다. 전례 없는 보통선거제의 도입, 국민주권의 승인,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전면적 긍정, 광범위한 사회화 정책의 도입, 의회주의의 긍정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공화국과 헌법 자체가 부분적인 게급타협의 산물이었고, 공화국의 지지기반도 예매하고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이 헌법에 규정된 사회진보적 정책의 실현과 관련하여 지난한 헌법해석투쟁이 예정되어 있었다. 사회적 권리목록의 현실화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진보적인 사민당과 공화파 정당들이 연정에서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초기에는 전후 배상문제, 프랑스의 영토점령, 우익쿠테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다 1920년대 중반에 겨우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의 여파는 걸음마 단계의 공화국의 정치적 기초를 일거에 무너트렸다. 대공황이 야기한 30% 이상의 실업률하에서는 어떠한 정상적인 정부도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정을 이끌어 왔던 공화파 세력은 지지율을 제고하지 못하고, 특히 부르주아 우파정당이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 상황에서 분산된 표들이 상당부분 공산당에 돌아갔으나 결정적으로는 나치당의 몫이었다. 실로 국민의 의사에 기반하지 않는 정부는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특정한 철학, 법사상, 법이론, 사상가집단이 나치 체제를 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가정은 젖어 두는 것이 좋겠다. 사상의 전투는 구름 위의 전투이며, 전쟁을 결정하는 곳은 지상전투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의 영역은 이미 실업률로 결판났으며, 사상-은 다만 그것에 편승하거나 부분적으로 기여하는 정도에 그쳤다.

 

2. 법사상의 형질변경

 

한나라가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이행했다는 사건만큼 법이론과 법사상에 대하여 충격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정의의 문제가 국민의 입법의지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근대적 이념이 실현되는 상황-물론 의회주의 형태로 상당히 완화되기는 하였지만-에서 헌법과 의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전제하는 법사상은 정치적으로 의심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의회민주주의에 대하여 일정한 태도를 표명해야만 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더 간단히 공화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흔쾌히 공화주의자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공화국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공화국의 정치적.제도적 기초를 제한하기 위한 법적 논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활동한 법철학자와 국법학자들은 역사법학파에서 우파 헤겔주의, 현상학, 생철학(生哲學), 신토마스주의, 신칸트주의, 좌파 헤겔주의, 유물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배경이나 정향 속에서 극우에서 극좌까지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철학적 배경이나 학파는 바이마르 시대에 등장한 수많은 법사상을 분류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배경이라는 것도 학파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동일한 정치적 태도를 취하도록 구속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철학적 기초는 다시 가공되게 마련이며,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철학적 간판을 간단히 철거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단순하고 의미 있는 분별기준은 공화국에 대한 심정적 태도이다.                                 下段  P-342          

 

심정공화주의자/이성공화주의자의 분류도식은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친(親)바이마르파/반바이마르파, 자유주의.민주주의.반민주주의, 실증주의/ 자연법론,의회/법원의 대립도식과 의미상 일치한다. 또는 법사상의 정치적 내용성을 보다 염두에 두고 분류한다면 보수반동,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분류는 당시 독일 정당의 후견인이었고,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는 기독교중앙당(ZENTRUM), 독일민주당(DDP),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는 사민당(SPD)공산주의자는 초기에 독립사민당(KPD)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1) 제국시대의 법학  

 

심증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법철학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19세기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규범과학 가릴 것 없이 실증주의적인 경향이 우세한 시대였다. 영국에서의 법실증주의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하에서 벤담과 오스틴의 분석법학과 명령설로 표현되었고, 독일에서는 비트샤이트의 개념법학, 그리고 사회적 현실에서 좀 더 주목하는 예링의 목적법학으로부터 출발한 법실증주의적 경향이 일반법론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일반법학적 실증주의자로서 베르크봄(K,Bergbohm)< 비얼링(E.R.Bierling), 메르클(A,Merki), 빈딩(K. Binding)을 들 수 있겠다. 일반법론은 더 이상 법현실 가운데에서 법의 가치나 이념을 구하지 않고, 법이념에 대한 고찰을 비과학적으로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베르크봄은 "법으로 기능한 것만이 법이며, 그 밖의 것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법 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정의(正義)의 문제는 법철학에서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라드브루흐는 이러한 일반법론이 '법철학의 안락사(Euthanasie derRechtsphilophie)"를 유도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가치를 배제하고 실정법의 분석과 체계화에 매달리는 일반법론의 태도는 국법학적 실증주의자들에게도 대체적인 것이었다. 일반국가학은 게르버(v.Gerber), 라반트(P. Laband), 엘리네크(G.jellinek) 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경향은 본질적으로 프로이센과 독일 제2제국에 대한 암묵적 긍정 속에서 수립된 현상기술적인 국가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정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법철학의 중심으로 확립하려는 시도가 슈탐믈러(R.Stammler)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마르부르크 학파(신칸트주의)을 병렬적으로 수립함으로써 칸트 이래로 지속된 바와 같이 실정법과 자연법을 분리하였다.

 

라스크(Emil Lask)와 라드브루흐(G, Radbruch)는 서남독일 학파(신칸트주의)의 영향하에서 문화철학으로서 법철학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법개념과 법이념의 문제를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법이념의 실질적인 문제-라드브루흐의 표현에 따르면 '합목적성'-는 다양한 정파적 세게관에 의하여 다원화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아직도 법철학은 중세 자연법이나 계몽의 자연법이 누렸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수 없었다. 라드부르흐는 나중에 마르부르크 학파의 신칸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광법위하게 수용하면서 법철학을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경향 옆에는 보수적인 독일 법철학이 항상 존재하였다. 현실과 가치를 동일시하려는 신비주의적 경향, 즉 역시법학파와 헤겔 우파의 보수적 국가철학은 프로이센 관료국가와 독일 제국을 인륜국가로 이상화하면서 종교적 의미를 지닌 긍정의 철학(실증주의)을 완성시켰다. 슈탈(Stahl)이 대표적 인물이다. 슈탈은 프로이센의 보수계급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면서도  역사법학파의 입장에는 궁극적 권위의 문제가 상당부분 미약하게 표현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슈탈은 한술 더 떠 신의 권위와 창조질서의 문제까지 올라가려는 시대착오적인 견해를 「신정론(Theodizee)」에서 피력하였다. 그는 봉건적인 루터교 아래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관헌국가를 재수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특징적으로 입헌적 군주제와 의회주의적 군주제를 구별함으로써 초기 자유주의자들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의회주의적 군주제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 도달한 권력분립, 의회주권 내지 국민주권을 전제한 군주제를 의미하였으며, 입헌군주제는 그러한 원리와 무관한 관헌국가를 의미하엿다. 그는 독일의 관헌국가를 입헌군주제로 이상화시키고, 이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당화시켰다. 역사법학파의 기본사상은 유럽의 근대사에서 보수적 국가철학의 아성으로서 신헤겔 학파의 파시즘의 기원이 되엇다. 이 점을 마르쿠제(H. marcuse)는 나치 시대 게관밥률가(桂冠法律家) 칼 슈미트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독일을 파시즘 국가로 되게 한 책임이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이론(국가사회주의이론)은 헤겔주의와의 관련성에 있어서는 완전히 부정적이다. 그 이론은 그 모든 목적과 원리에 있어서 반(反)헤겔적이었다. 국가사회주의의 중요한 정치이론가의 하나인 칼 슈미트보다도 이 사실을 더 잘 입증할 수 잇는 사람은 없다. 그의 저서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Begriff des Politischen)」(1932)의 초판에서, 그는 헤겔의 정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베를린에 머물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어쨌든 1840년 이후 프로이센에서 권위 있던 학파(역사법학파:필자)는 슈탈(Stahl)의 '보수적 철학'을 받아들이기를 더 좋아한 반면에, 헤겔은 칼 마르크스로부터 레님으로, 모스크바로 떠돌아 다녔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날에 "맣하자면, 헤겔은 죽었다."라는 뚜렷한 말로 전 과정을 요약하고 있다.

 

2) 법률실증주의의 구조변동

 

바이마르 시대의 헌법사상의 일부가 국내에서 헌법관(憲法觀)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이 시대의 법사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오늘날에는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실증주의를 거론하는 것이 좋겠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실증주의의 정치적 조건이 분명히 변화되었다. 실증주의는 국법학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국가철학적이며 정치적인 차원을 자각하였다. 실증주의는 '관헌국가적' 또는 '국법학적 법실증주의'에서 '법치국가적' 또는 '민주적 법실증주의'로 이행하였다. 이러한 실증주의에는 바로 공화국, 국민주권, 의회주의의 토대 위에서 국가와 법을 이해한다는 근본전제가 확립된 것이다. 그것은 정태적 이론에서 동태적 이론으로 변화되었다. 법실증주의 내에서도 좀 더 분별이 필요하다. 하나는 자유주의적인 의미에 치중하는 실증주의와 사회적 입법을 강력히 옹호하는 수담으로 법을 이해하는 실증주의이다. 그래서 실증주의는 대단히 도식적이지만 결국 '자유주의적 법률실증주의'와 사회주의적 법률실증주의'로 분별된다. 이들 자유주의의 진보파는 나치 제국의 등장과 동시에 상속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독일 역사에서 제명된 사상들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자유주의적 법률실증주의의 예로 안쉬츠(G. Anschutz), 토마(R. Thoma), 켈젠, 엘리네크를 들 수 있다. 안쉬츠는 바이마르 헌법의 대표적인 주석서를 남긴 학자이고, 히틀러가 집권하자 자신의 신조와 양립할 수 없는 국가의 헌법을 가르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헌법이론은 전체적으로 공화주의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나 재산권문제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르부르크  신칸트 학파 헤르만 코엔(H. Cohen)과 오스트리아 신실증주의 영향하에 법학(학문)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을 구별하고 법학의 학문적 독자성을 강력하게 옹호함으로써 엄격한 '법학적 실증주의자'가 되었다. 나아가 켈젠은 법학적 실증주의의 정치적 취지와 과학적 취지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피력하였다.

 

법은 그 본질상 도덕이며, 즉 도덕적 사회질서만이 법이라는 주장은 순수법학에 의해서는, 그것이 절대적 도덕을 전제하기 때문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법공동체에서 지배적인 법학에 의해 사실로 적용되면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국가적 강제질서의 무비판적인   정당화예로 귀착하기 때문에도 거부되었다....이러한 실정법의 정당화는 논리적 불충분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좋은 봉사를 할지 모른다. 그것은 법학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학은 법을 정당화하여서는 안 되며, 자기에 의해 오직 인식되고 기술될 뿐인 규범질서를--절대적 도덕에 의해서도, 상대적 도덕에 의해서도---도데체 정당화하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켈젠 법철학의 방법과 내용에 대하여는 당대의 보수사상가들뿐만 아니라 진보파진영에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여다. 켈젠은 학문영역에서 거의 우군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분리하였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 국가론과 법이론에 민족적이고 윤리적인 군살(보수적인 정치사상)이 박힘으로써 그러한 체제는 조만간 권위적인 인륜공동체로 스스로 이상화시킴으로써 필경 이단자와 소수자를  억압하리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민한 유대인의 자유감각의 전형이었다. 그는 법치국가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자유주의의 선봉자로서 모든 이데올로기--보수적 자연법과 공산주의--에 대한 예리한 비판자였다. 반자유주의적인 보수사상가들이 켈젠을 즐겨 비판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회주의적 법률실증주의자로는 라드브루흐, 진츠하이머(M, Sinzheimer), 헬러(H. Heller), 프랭켈(E. Fraenkel), 노이만(F. Neumann)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심정공화주의자를 넘어서 심정사회주의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들은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의회가 사회주의적인 입법을 광법위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들을 실증주의자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의회주의적 기초 위에서 입법자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논리를 펼쳤다는 데 있다. 즉, 보수적 사법부에 대하여 민주적 입법부의 우월성을 강력하게 옹호했다는 데서 그들을 정치적 실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으나, 방법론적 및 철학적 의미에 있어서 실증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다.

 

켈젠과 더불어 법철학적 상대주의자로 알려진 라드브루흐는 피히테(Fichte), 리스트(Liszt), 라스크(Lask) 그리고 신칸트 학파 사회주의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문화철학에 기초하여 사회입법과 같은 정치적 정의(正義)문제에 있어서는 다양한 견해가 맞설 수  있다는 점을 승인하였고, 민주주의와 의회만이 이에 대하여 결정권을 누린다고 이해하였으며, 법관은 의회가 제정한 법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정당국가 형태로 이해한 최초의 독일 법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사민당원으로서 두 차례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고, 베른 슈타인과 함께 괴를리츠ㅡ 강령(1921)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사회법(Sozialrecht)의 도입을 추진하였고, 칸트, 포이어바흐, 리스트로 이어지는 독일 계몽주의에 입갓하여 새로운 형법전을 초안하기도 하였다.

 

헬러는 헤겔으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헌법학자이다. 그는 방법면에서 실증주의자로 분류할 수 없지만, 사회입법을 지지하고 그러한 법률에 대하여 입법부가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다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진영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진보적 헌법학자 1세대였으나 유대인이자 진보파라는 이유로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사민당의 압력과 후원 속에서 1928년 베를린 대학의 원외교수가 되었고, 1932년에 프랑크프르트 대학의 공법학 정교수가 되었다. 공화국헌법을 진보적인 관점에서 거의 유일하게 학문적으로 완성시키려는 기대를 받았던 헬러는 1933년 망명지 마드리드에서 42세ㅔ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가 독일법에 남긴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마도 '사회적 법치국가(sozialer Rechtsstaat)'일 것이다. 진츠하이머는 사회법 및 노동법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에른스트 프랭켈, 프란츠 노이먼, 좀 더 좌익한 오토 키르히하이머는 당시 신진학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크게 활약하지 못하였고, 미국 망명 후에 히틀러 체제를 분석하여 각각「이원국가」, 「비헤모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파시즘으로」를 남기고 유명해졌다.

 

3) 보수적인 법사상

 

독일  역사법학파와 헤겔 우파의 뿌리에서 성장한 국법학자와 법철학자들은 반공화국적 국가철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침략전쟁의 온상이 된 독일의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철학을 전개하였다. 앞서 지적한 대로 슈탈의 법철학이 그 선구가 되겠다. 유기체, 민족, 전체, 복음주의, 소명, 신분제국가가 이러한 법사상의 단골 메뉴였다. 이는 근대 유럽 문명이 수락한 계몽주의적 부리, 즉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것이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무론 이론은 그 창시자의 의도의 부당성을 밝힘으로써 반박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반공화적 심정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당시 사상을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자들도 이성공화주의자로 구조변동을 하긴 하였다. 물론 그것은 공화국에 대한 외견상의 동조였으며, 정당 스펙트럼에서도 극우적인 독일민족주의 국민당(DNVP)과 음으로 양으로 관련을 가졌다. 그들은 성향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하여 비(非)참여적 관점에 서거나 전투적인 관점을 취하였다. 생리적으로 신성로마 제국의 엣 영광에 어울리는 사람들, 또한 반사회주의적인 의도에서 의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이들은 제국시대, 바이마르 시대, 나치 시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기까지 독일 법학의 중심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여기에 빈더, 슈미트, 카우프만, 자우어(W.Sauer)< 스멘트, 라렌츠(k.Larenz), 트리팰(H. Tripel) 등을 포함시킬 수 있다.

 

보수적인 법철학 및 국가철학은 외견상 항상 자연법론의 형상을 지닐 수밖에 없다. 모든 정치적 함의, 주의주장을 제거해 버린다면, 법실증주의와 자연법의 형식적 차이는 일원성이냐 이원성이냐에 있다. 법실증주의는 국가입법을 정당한 것으로 시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반면에 자연법은 국가법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국가법 또는 개별적인 법제도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법 안의 논리'가 아니라 '법 바깥의 논리'가 필요하게 된다. 바이마르 시대에 이들이 만들고 진지하게 추구하였던 이원성의 관점목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초정당국가', '제도'.'통합'.'실체적 법치국가'. '위헌법률심사','정당성'. 이러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정당은 자연법당이자,초국가당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즉 현실의 민주주의를  펌하할 수 있는 개념들의 정당이다.

 

보수적인 사상가들은 진보적인 입법시대에는 --그 내용이 자기 사상과 불일치하기 때문에--당연히 자연법론자가 되며, 반동적인 입법시대에는--그 내용이 자기사상과 일치하기 때문에--당연히 극단적으로 신비적인 자연법론자가 된다. 이 점은 자연법이 실정법에 대하여 두 가지 방향으로, 죽 한편으로응 실정법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정법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준거로서 자연법을 마련하는 것은 모든 법철학자들에게 유효한 과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바이마르 시대에, 그리고 나치 시대에 등장했던 허다한 자연법은 보수적인 정치사상으로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전파하는 자연법에 불과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3. 법철학적 쟁점

1) 법치국가

법치국가 개념은 오늘날의 토론에서는 허다한 법적 원리들을 포괄하는 집합소로서 개념적으로는 명료성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에는 이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논쟁적인 개념이었다. 법치국가의 개념은 역사적으로초기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적 구성물이었다.이러한 개념의 발전사에서 칸트, 포이어바흐, 벨커(C. Th Welcker)< 그나이스트(Gneist)< 베르(O.Bahr)< 몰(R. V. Mohl)과 같은 학자들을 거론할 수 있겠다.그러나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군주국가의 현실조건 속에서 법치국가를 구상하였기 때문에 국민주권론이나 의회주권론과 연결되지 않은 채 법을 통한 국가로부터 자유라는 측면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독일 시민게급의 전장(戰場)이 정치적 주권과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리보호적인 사법장치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법치국가 개념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국가권력은 국민 또는 그 대표자에 으하여 형성되어야 한다는 민주적권력형성론을 의미하였다. 한편으로 법치국가는 개인늬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입법은 공정하며, 자의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배제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 문제가 민주주의 문제라면, 두 번째의 것은 자유주의의 요구라고 할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 와서 처음으로 법치국가의 민주주의 차원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초기 자유주의의 연장으로서 법치국가 개념은 시민게급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의미에서는 부르주아적이었고, 민주주의의 요구를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정치적 현실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다소간 관헌국가적이었다. 이러한 개념이 바이마흐 공화국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정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나타나게 되었다.

 

법치국가 개념은 먼저 형식적 법치국가와 실질적 법치국가로 구별되고, 다음으로 실질적 법치국가를 사회적 법치국가와 실체적 법치국가로 분별하는 것이 좋계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는 앞 항에서 논의한 법사상의 기본분류와 서로 호응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형식적 법치국가는 켈젠의 법률적 국가관에서 비교적 명료하게 피력되었다. 형식적 법치국가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정치적 가치의 실현을 전제하지 않는다. 법치국가는 그 자체로 민주적 입법자에 대한 존중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의회주권의 완화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법치국가 개념은 실제로 대단히 내용 없는 것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제한이 오로지 의회입법자의 의사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고를 간단히 권력국가사상이나 실력설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가를 일정하게 윤리적으로 분식하고 이상화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적인 국가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국가 개념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실질적 법치국가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른 내용을 가지는 국가개념이다. 그래서 실질적 법치국가 개념은 좀 더 명확하게 사회적 법치국가와 실체적 법치국가 개념으로 구분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진보파와 보수파가 '실질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서로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진보파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그러기 위해서 기득권과 소유권을 제한하는 사회진보적 입법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실질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과 동의어였다. 즉, 진보파에게 실질적 법치국가는 사회적 법치국가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분명 입법자의 권한범위를 확대하는 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부르주아적 경제질서를 아예 전제하고 그 기득권을 불가침으로 못 박는 부르주아적 법치국가와는 달리 억압받는 계층의 이익을 위하여 입법자에게 포괄적인 조정권력을 부여하는 논리가 되었다. 그들은 단지 정치적 영역에 머무른 법치국가 개념을 '경제 및 재산질서'에 까지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헬러의 실질적 법치국가 또는 사회적 법치국가 개념이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형식적 법치국가와 사회적 법치국가의 관계에 대한 켈젠의 입장은 매우 흥미롭다. 켈젠은 사회민주당의 지지자라 할 수 있는데, 형식적 법치국가를 국가의 형식으로 이해하고, 반면에 실질적 또는 사회적 법치국가를 국가의 내용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형식적 법치국가 개념이 가지는 민주성과 개방성을 시사한다. 즉, 이와 같이 형식적 법치국가 개념은 전형적으로 부르주아적 경제질서를 전제로 한 자유주의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적 차원으로까지 이행함으로써 이제 억압된 계급에게까지 봉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하..................중략             2122.2.9  am: 03:27